
다시 기억하게 될
사련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팔 백여년의 시간을 그저 흘러가는대로 지나온 사련에게는 다를 것이 없는 날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아무도 그를 챙겨 주지 않았으니 잊으면 잊은 대로, 설령 기억한다 해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이 날도 그랬다. 사련은 자신보다 한 달 가량 빠른 화성의 생일은 선물은 뭘로 할지, '자신'과 함께 하게 된 생일을 앞으로 어떻게 특별하게 보내게 해 줄지 고심하고 또 고민했으면서 정작 자신의 생일은 잊어버렸다.
다만 사련의 앞에서는 평소와 다름 없어 보이는 화성이 뒤에서는 뭔가 바쁘다는 것 어렴풋하게 느꼈을 뿐이다.
화성과 진심을 나눈 이후로 화성이 사련의 앞에서 딱히 숨기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만약 무언가를 숨긴다면 그것 역시도 사련을 생각해서 숨긴 것이리라. 이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전하에게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으니까.
하지만 사련은 이를 굳이 묻지 않았다. 화성이 자신에게 숨긴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적은 처음이라 걱정이 돼 조금 안달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그가 자신의 삼랑에게 이를 물어 볼까 말까 고민한지 며칠이 지났다.
'혹시 내가 기원 때문에 바빠서 말 못한거일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물어보는 거야.'
마침내 사련이 화성에게 묻기도 결심한 바로 그 날이었다.
이날 사련은 이른 새벽에 기원을 해결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기원을 늘 화성과 같이 해결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화성은 언제나 따라가고 싶어했지만.
그러나 이날은 평소와 좀 많이 달랐다.
아니, 어쩌면 옛 생각이 나게 하기도 했다.
"풍신, 모정? 진짜로 따라올거야?"
"네."
"뭐 안됩니까?"
풍신은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모정은 하루라도 빼먹으면 섭섭한 눈 까뒤집기를 선보였다.
"아니야 기뻐서 그래. 고마워."
"..."
"..."
중천정의 꼬마 소무관의 모습도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자신을 돕겠다고 나선 두 사람을 보니 사련은 문득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동로산에서도 셋이 함께하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더더욱 잠시 그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물론 과거가 아닌 현재이기에 사련은 웃을 수 있었다.
"왜 웃습니까?"
"웃으실 수도 있지, 웃으면 안 되냐?"
"너한테 안 물었거든?"
사련은 화해 후에도 투닥거림을 멈추지 않는 풍신과 모정의 등을 밀며 말을 이었다.
"자자 어서 가자. 이 요괴는 새벽이 지나면 잡기 힘들어. 이러다 동이 트겠어."
***
"간단하네요."
풍신은 그리 말하면서도 요괴가 봉인된 오뚜기를 흘끔거렸다. 모정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고마워. 덕분에 손쉽게 잡았어."
"덕분은 무슨, 이런 요괴면 당신 혼자서도 충분히 잡을 수 있었을 텐데요."
"그래. 그래도 고마워."
사련의 대답에 모정은 시선을 돌렸다. 사실 사련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두 사람이라면 자신이 처리하려는 요괴가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을텐데, 어째서 도우려 온 것일까.
"혹시 나한테..."
할 말이 있냐고, 그리 물으려던 참이었다. 풍신이 잽싸게 꽁꽁 포장된 무언가를 사련 앞에 불쑥 내밀었다.
"응?"
얼결에 받아들고 멀뚱히 손 위의 물건을 바라보는 사련에게 모정도 슬쩍 천에 싸인 무언가를 올려놓더니 슬금슬금 몸을 빼며 말했다.
"나중에 풀어 보세요."
풍신이 급히 이어 말했다.
"꼭 저희가 가고 난 뒤어야 합니다!"
그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은 요괴를 잡을 때보다 더 서둘러 상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
혼자 남겨진 사련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풍신과 모정이 사라진 자리만을 바라보다 손 위의 물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동쪽에서 비춰온 햇살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
귀시장 극락방으로 돌아온 사련은 평소와 다름 없이 마중 나온 화성을 반겼다.
"삼랑."
"형 왔어? 새벽에 나타나는 요괴라니 별로네."
"그래도 가끔은 새벽 공기를 맞이하는 것도 좋아."
"그게 아니라 형, 일찍 일어나야 하는 날이면 형이랑 늦게까지 못 놀잖아."
말문이 막힌 사련은 화성에게서 고개를 슬쩍 돌린 채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 사련을 화성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뒤따랐다.
"형? 왜 시선을 피해?"
대답 없는 사련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져만 갔다. 그바람에 화성에게 물어보려 했던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그였다.
***
"좋아, 삼랑! 이번에 새로 할 요리가 생각났어."
사련은 부엌으로 들어서며 팔을 걷어붙였다.
"형이 요리하게?"
"응.. 혹시 따로 먹고 싶었던 거 있어?"
"아니야. 형의 새 요리라니 너무 기대되서 그래."
그리 말하며 눈웃음을 짓는 화성은 평소와 같아 보였다.
그러나 이날은 느긋히 밥 먹을 여유도 없이 바쁜 날이었다. 사련은 곧바로 다음 기원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했다. 이번에는 화성도 사련을 돕겠다며 따라나섰다.
***
어느덧 마지막 기원을 해결한 사련의 눈동자에 빛이 끝없이 수놓인 어둠이 찾아왔다.
그런 그에게 어딘가 평소와 다른 느낌의 화성이 다가왔다.
"삼랑?"
"전하."
"왜..."
"형이랑 가고 싶은 곳이 있어."
화성은 형을 데려가고 싶은 곳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이날은 특히 더 전하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으니까. 어떻게 말해도 사련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는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가만히 사련의 반응을 기다렸다. 사련의 예상대로 화성은 그 몰래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다만 사련은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며칠 전.
화성은 다가오는 전하의 생일을 위한 준비를 하고자 했다. 그의 발걸음이 새롭게 고친 무기고에 닿았다. 사련이 확실하게 좋아해줄 선물이었지만 이미 이곳은 처음 만든, 아니 무기를 모으던 순간부터 전하의 것이었다.
걸음을 돌려 무기고를 나온 화성의 시선 곳곳이 극락방 여기저기를 스쳐 지나갔다. 어지간한 귀하다는 물건은 발치에 굴러다니고 있었고 단순히 비싸기만 한 물건으로는 사련에게 줄 선물로 성에 차지 않았다. 형은 아마도 성의가 들어간 선물을 더 기뻐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번엔 자신이 형을 위한 요리를 해주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잠시 들었다.
자신을 만나지 못한 수백 년의 삶 속에서 전하는 어떻게 지내셨을까. 스스로 운을 흩어버리고 바닥을 걸었던 한 신은 흐름을 걸어왔을까, 휩쓸려왔을까.
화성은 사련이 앞으로 걸어갈 흐름을 좋은 일로만 꾸며주고 싶었다. 불운이 닥치더라도 자신이 신을 지킬 것이다. 사련이 보기에는 화성은 이미 기억을 행복으로 가득 채워 주고 있었지만, 화성은 부족했다. 더군다나 전하의 탄신일이 아닌가.
생각을 거듭하던 화성은 문득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욕심이 일었다. 전하께서 가장 괴롭고 힘들었을 시절, 그 기억을 다시 행복으로 덧씌울 수 있을까. 선락국에서의 기억이 고통으로 잠식당했다면 그것과 연관된 것들이 슬프고 적막한 게 아니라 조금은, 반짝일 수 있는 기억으로 덮어줄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분명 욕심임을 알았다. 또한 현재 아무리 한없이 행복을 쥐어도, 상처가 아물었다고 표현해도, 과거는 결코 변하지 않고 여전히 '아프다는' 것을 안다. 단지 딛고 일어설 힘이 강해진 것이라는 걸 화성은 모르지 않았다. 기억은 덧씌울 수 없다. 상처를 이겨낼 힘을 실어주는 것일 뿐이다.
짧은 사이에 일련의 생각들이 지나간 화성의 시야에 문득 액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뒤돌아 무기고를 바라봤다.
***
시끌시끌한 귀시장을 피해 화성은 사련과 함께 고요한 산 속 어느 장소를 찾았다. 소박하지만 정갈해보이는 작은 집과 정자가 자리하고, 그 앞에 펼쳐진 잔잔한 호수 위에는 달빛이 은은히 퍼져 있었다.
화성은 사련의 손을 이끌어 정자에 마련된 의자로 안내했다. 곳곳에 마련된 등불이 호수와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형을 위해 준비했어."
그 말을 뒤로하고 화성은 호수 위로 발을 내딛었다. 은나비가 조용히 날갯짓 하며 너울거렸다. 그 중 몇 마리는 호수 밖에 내려앉으며 자리와 어울리는 곡조를 흘려보냈다. 어느새 손 위에 검을 잡고 그에 맞춰 걸음걸음을 내딛는 화성의 발 아래로 호수의 파동이 일었다 수면에 스며들었다.
밤하늘의 별빛도 수면 위로 비춘 달빛도 홀린 듯 그를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던 사련은 어쩐지 그의 검무에 짝이 빈 느낌에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본 화성은 이조차 준비했다는 듯 웃음지으며 자연스레 손을 내밀어 사련을 가볍게 이끌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화성은 사련의 귓가에 붙어 작게 속삭였다.
"전하... 생일 축하드려요. 사실은 전하께 슬프게 남은 기억을 행복으로 채워주고 싶었지만 제게 감히 그럴 자격이 있을지 몰라 전하와의 첫만남을 떠올리며 준비해봤어요. 형이 내게 준 기쁨을 되돌려주고 싶었거든."
사련은 그제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깨달았다. 화성의 목소리는 확신할 수 없다는 듯 살짝 잠겨 있었다.
"삼랑, 그거 알아? 너와 함께 하게된 모든 순간으로 인해 과거는 내게 더 이상 슬픔으로만 남아있지 않아."
사련은 서늘하지만 따뜻한 그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아픔도 있어. 그건 되돌릴 수가 없어. 하지만 네가 그 모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들어줘."
그리고 고개를 들어 화성과 눈을 마주했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고요한 호수에 내려앉은 달빛 위로 잔잔한 파동이 일렁였다. 그곳에 발을 내딛인 두 사람은 서로에게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얽혀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