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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

"큰ㅇ..., 큰아버지!"

 

귀시장을 둘러보며 걷던 사련은 자기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저를 부르셨나요?"

사련이 뒤를 돌아보자 한쪽 눈을 붕대로 가린 어린 귀신이 사련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닮아있어 사련은 그 귀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혹시 이름이 뭐니?"

"적아입니다! 큰아, 아니, 사도장님! 저, 저희가 이번 전하의 탄신일을 맞이해서 성대하게 해드리고 싶은데 성주께선 폐물들은 꺼지란 말만 하셔서..."

적아라니 이름조차 그의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사련은 적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탄신일이라는 말에 벌써 여름인가 하며 입을 열었다.

"나의 생일을 준비하려고 하는구나. 내가 삼랑에게 말해볼게."

"감사합니다, ㅈ... 사도장님!"

그들이 대화를 나눈 귀시장의 복판에서 조금 떨어진 객잔의 난간에서 지켜보던 화성은 어린 귀신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훌쩍 뛰어넘어 사련의 곁으로 내려왔다.

"형, 무슨 이야기 했어?"

"아 삼랑, 마침 잘 왔어! 나의 생일 말인데 이번에 성대하게 하는 게 어떨까? 너의 생일을 내가 망쳐서 이번에는 귀시장의 모두와 나의 생일을 축제처럼 보낸다면 참 즐거울 것 같아."

"난 내 생일에도 충분히 즐거웠어. 하지만 형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러자."

화성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련은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화성에게 인사하며 멀리서 다가오지 못하고 구경하고 있던 귀신들에게 다가갔다. "삼랑이 된다고 했어요. 즐겁게 준비를 시작해볼까요?"하는 전하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자 우렁찬 귀신들의 대답이 들려왔다. 화성은 그러한 사련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앞에 남아있던 '찌꺼기'를 바라보았다.

"잘도 기어 나왔군. 이번 일은 네가 꾸민 거냐."

"내심 그렇게 하기를 원한 것 아니었나요, '삼랑'?"

"이번은 전하가 즐거워하시니 봐주지. 하지만 다음번에도 몰래 이런 일을 계획해서 전하를 귀찮게 한다면 없애버리겠다."

화성이 어린 귀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자 계속 눈을 빛내고 있었던 어린 귀신의 눈빛이 사라지면서 적대적인 눈으로 화성을 마주 보았다.

"나도 너야. 너의 남은..."

뒷말을 흐린 붕대를 감은 어린 귀신은 홀연히 사라졌다. 화성은 머리를 쓸어올리더니 붕대 주변을 손으로 감싸며 "그때 모조리 처리했어야 했는데."하고 중얼거렸다.


*

 


그 이후로부터 귀신이고 신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바빠졌다. 사련의 생일 연회를 귀시장에서 하는 탓에 상천정의 신관들도 귀계에서 모든 일을 준비해야 했다. 그중에는 풍신과 모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가 또 왜 이 옷을 입어야 합니까!"

모정이 들고 있는 옷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말했다. 풍신이 모정이 바닥에 내팽개친 옷을 주워 확인해보니 과연 그 오래전 입었던 적이 있었던 옷이 확실했다. 그도 그랬던 것이 자신들 앞에 있는 사련이 입고 있는 옷은 열신무자의 그것이었고 풍신이 들고 있는 옷은 요마무자의 것이었다.

"전하, 그런데 이 옷은 왜 필요한 겁니까?"

"아, 귀시장의 모두가 상천정의 높은 신분들은 중추연같은 연회 때 연극을 본다는데 우리도 하면 어떨까 하고 의견을 내서 말이야. 하지만 삼랑이 폐... 다들 가만히 앉아서 연극을 볼 리 없다며 연극 대신 축제 행렬처럼 귀시장 거리를 꾸미고 모두가 즐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어."

"그래서, 제가, 왜! 요마무자 옷을 다시 입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건 음... 축제의 주제가 제천유니까? 귀시장분들이 태자열신을 궁금해했거든. 마침 열신무자 옷이 화려하기도 하고 제천유가 축제에 어울리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사실 축제가 오랜만이라 너무 들뜬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

말을 하는 사련의 얼굴이 다가오는 축제에 대한 설렘과 조금의 자책으로 물들자 모정이 사련이 못 보게 뒤돌아서 눈을 한번 위로 뒤집은 뒤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입으면 되지 않습니까, 입으면. 단, 이번에도 저는 진심으로 대할 겁니다. 사련, 당신에게만은 대충해서 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모정은 옆에  풍신을 끌고 얼마 남지 않은 축제의 준비를 하겠다며 검을 챙겨나갔다. 멀어지는 풍신과 모정이 각각 "나는 왜 데려가는 거야!", "그럼 요마무자 준비를 혼자 하냐! 상대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서 무대장치 위에 펼칠 비무연습을 마친 사련은 화성이 구해다 준 화려한 검을 보며 장식이 많지만 참 좋은 검이라며 검집에 검을 넣고 보관하려 했으나 검집도 검을 꽂을만한 검대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사련은 검을 조심히 들고 걸음을 옮기려고 했으나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제게 주십시오. 검을 맡아놓겠습니다."

그 소리에 사련이 뒤돌아보자 얼굴에 피가 묻은 낡은 붕대를 한, 그보다 더 낡은 듯한 갑옷을 입고 검을 차고 있는 귀신이 보였다. 그 소년을 본 사련은 얼마 전 '적아'라는 아이를 봤을 때와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그들'은 어떤 연유에서든 화성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사련은 홀린 듯이 검을 그 귀신에게 맡겼고 그는 자신의 할 일은 이것이 끝이라는 듯이 조용히 물러났다.

 


*

 


며칠 뒤 사련의 생일 당일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사련의 생일 연회를 준비했다. 귀시장의 거리에는 화려한 홍등이,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높은 천등관이 보였고 생일 축제의 행진을 보러 온 귀신들로 거리가 가득 채워져 귀기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극락방에서 내려다보던 사련의 뒤로 화성이 다가왔다.

"형, 정말 괜찮겠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응? 나 괜찮아! 음 괜찮은걸!"

화성이 사련을 뒤에서 안고는 어젯밤에 유난히 지분거렸던 은밀한 곳을 스치듯이 만지면서 말하자 사련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화성은 안타깝다는 듯이 눈웃음을 짓다가 사련의 입술을 쪼듯이 입맞춤했다. 

"형, 생일 축하해."

그 말을 뒤로 입을 맞추는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쯤 두 사람은 나갈 준비를 마쳤다. 화성은 잠시 들릴 데가 있다며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그의 허리춤에는 액명말고도 눈에 띄게 낡은 검이 하나 꽂혀 있었다.

"삼랑, 이 검은 뭐야?"

"그냥 낡은 검이지. 이제는 쓸모가 없으니 버리려고."

화성의 말을 듣고도 사련은 그 낡은 검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잘 모르겠지만, 왠지 모를 끌림이 느껴졌다. 사련의 시선이 검에 가있음을 아는 화성은 자연스럽게 사련의 시선을 분산시키며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전하, 당신의 생일을 정말 이렇게 보내도 괜찮습니까."

"물론이야, 삼랑. 내 생일이 모두의 축제가 되는 날이라는 날인 편이 좋아. 다 같이 즐겁게 보낼 수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해. 고마워, 삼랑."

화성의 눈이 잠시 침잠한 듯 보였다가 이내 웃고는 사련과 함께 나갔다.


*

 


"천관이 복을 내리시니, 마귀와 요괴는 물러가라!"

마치 귀시장에 그 시절 선락국의 신무대로가 재현이라도 된 듯 귀시장 대로 양쪽에서 귀신들의 울림이 천정을 뚫을 듯이 쏟아졌다. 마지막 준비를 하다 극락방의 최상층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사련의 눈에 잠시 아련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와 장소도 분위기도 시대도 다르지만 거리에 관중, 분주하게 준비하는 무대장치를 옮기는 이들과 행렬의 무대에 오를 자들, 악사와 의장대까지 무엇하나 빠진 것이 없었다. 그때 그대로였다. 

추억에 잠긴 사련의 뒤로 그림자가 하나 다가왔다. 그는 허리춤에서 조용히 검을 빼 들고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사련에게 내질렀다. 그러자 사련은 빠르게 뒤를 돌아 검 끝을 손가락으로 잡고 공격을 흘리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사련의 앞에는 검은 무복을 입고 요마가면을 쓴 이가 서 있었다.

"모정?"

요마를 연기하는 맞은편의 소년이었던 자가 말없이 다시 한번 일격을 날려왔다. 사련은 알만하다는 듯이 웃고는 검을 뽑아드는 대신 약야를 날려 눈앞에 있는 모정의 손목을 치고 몸통을 꽁꽁 묶었다.

"젠장! 사련, 이거 안 풉니까!"

모정이 발버둥치자 사련이 모정을 묶은 약야를 두드리며 풀어주라고 하였다. 그제야 자유의 몸이 된 모정이 꿈틀거리는 흰 천을 흉물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이 이어준 부분을 발견하고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사련에게 검을 겨눌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사련에게 질투심과 동경을 품었던 지난날이 생각나기도 했고, 그래, 그저 옛날 생각이 났을 뿐이었다.

"사련, 곧 연회의 행렬이 출발할 겁니다. 나가시죠."

"그래, 가야지. 같이 나가자, 모정."

"말 안 하셔도 갈 겁니다."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더는 그들이 태자 전하와 그 시종이 아닌 친구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같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친구가.

극락방을 나오니 풍신이 서 있었다. 과연 무신의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으니 그가 신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오늘 행렬의 막을 올릴 것이 그의 화살이었으니 꾸민 것이 분명했다. 사련이 무대에 오르고 풍신이 뒤따라 올라갔다. 모정은 아래에 숨어 요마무자가 등장해야 할 장면에서 나올 예정이었다.


*


둥, 둥, 하는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무대의 가장 앞에 서 있던 풍신의 쏜 커다란 화살이 공기를 찢을 듯이 현음을 남기며 깃발을 터뜨리자 풍악이 울려 퍼졌다. 악사들이 귀신들인지라 기이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가히 제천유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귀신은 자신의 갈비뼈를 악기 삼아 두들겼으며 다른 귀신은 자신의 머리를 들고 머리카락으로 현을 뜯기도 했다. 그 모습을 커다란 무대장치인 꽃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가마 위에서 지켜보던 사련은 이런 축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악사들의 뒤를 따른 것은 의장대였는데 물론 귀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통의 의장대는 갑옷을 두른 병사들이나 꽃을 뿌리는 미인들이 있어야 했지만, 흉내를 낼 뿐인 그들은 입에서 독이 뿜어져 나오고 몸 여기저기에 흉기들이 꽂혀있는 흉흉한 본새였다. 그렇다고 꽃을 뿌리는 미인들이 평범했느냐 하면 아니었는데 꽃을 뿌리면 뿌리는 족족 썩거나 '치익'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는데 그 꽃에 맞은 관중과 의장대가 싸우는 일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제지하는 것은 관중들 사이에 끼어있는 각각의 '손님들'이었는데 귀시장에서도 아리따운 여귀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배장군이나 웃으면서 귀신들과 벌써 친해진 듯한 청현,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다 먹은 돼지의 다리뼈를 던지는 자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낯을 파랗게 굳히며 손가락질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바로 선락국의 국사였다.

"저...! 저게 무슨! 신성한 제천유가 이런 귀신들의 유희거리가 되나니 태자전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원."

"그래도 선락의 표정을 보니 퍽, 즐거운 모양이야."

"이 꼴을 보고도 즐거워하실 성정이긴 합니다."

삿갓을 눌러쓴 그는 과열된 싸움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중재시키는 등 무술이 특출나 보였고 국사는 특유의 언변으로 싸움을 중재시키곤 했다. 

난장판이었지만 나름의 정리가 되는 앞의 행렬이 지나자 본무대인 화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날을 재현이라도 한 듯 금빛을 두른 열여섯 마리의 말이 이끄는 화대가 차마 싸우느라 비켜서지 못한 앞의 행렬을 짓밟고 나타났다. 화대 위에는 흉악한 가면을 쓴 검은 옷의 요마가 9척에 달하는 참마도를 바닥에 꽂고 기세를 가다듬었다. 요마무자는 바닥에 꽂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장도를 손쉽게 뽑아내며 도사 역할을 맡은 귀신들을 다 쳐냈다. 요마가 농간을 부리는 '요마화인'에서 오히려 요마무자가 진짜 요마를 물리칠 무렵 귀신들 사이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큰아버지다!"

열신무복을 입은 열신무자가 왠지 그 소리를 듣고 꽃가마에서 뛰어내리다가 주춤한 형세였지만 그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귀신들도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태자열신, 신을 기쁘게 하였다는 열신무복을 입은 사련이 내려왔다. 그 모습은 가히 아름답고 웅장한 것이어서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사람이 착지하자 잠시 가만히 있던 요마무자도 느릿하게 그 장도를 들어 화대 위 화려한 비무를 펼쳤다. 처음에는 비무로서 임했던 두 사람이 점점 각자의 무기에 힘을 싣게 되고 흑과 백의 전투로 번지자 아름다움에 말을 잃었던 귀신들이 다시 흥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지지 말라며 과열된 분위기 속에 싸우던 두 사람 중에서 흑의를 옷을 입은 자가 입을 열었다.

"꼭 저였어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까? 밑에 깔린 게 요마들인 것을요."

"하지만 너는 내 '친구'잖아. 요마무자를 맡아줄 만한 사람은 모정 너뿐인걸?"

"그래요, 저는 입 다물고 요마무자나 하겠습니다."

커다란 요마가면에 가려져 있는 귀가 조금 붉은 것을 발견한 사련은 작게 웃었고 두사람은 이 무대를 끝내야 할 때가 온 것을 직감하며 요마무자의  큰 검을 쳐내고 한쪽 무릎을 꿇은 요마무자를 처단하려고 할 때였다. 

환호성이 터지고 모두가 몰두할 동안 열신무자를 조용히 지켜보던 자그마한 인영이 귀시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 몸을 던졌다. '어어!'하는 소리가 안쪽에서 터지자 묘한 기시감을 다시 느낀 사련이 고개를 들어보니 성루에서 떨어지는 그림자가 시야에 담겼다. 

사련은 설마 하는 마음과 그럴 리가 없다는 마음을 품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다행히 전날의 여파로 법력은 충분했고 빠르게 떨어지는 인영을 품에 안고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품 안을 들여다보니 일전에 보았던 그를 닮은 적아라는 아이가 분명했다.

"너는..."

사련이 입을 열자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산호주를 사련에게 전해주면서 말했다.

"전하, 늘 돌려 드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걸 보면서 살아갈 마음이 들 수 있었고 이걸 보면서 항상 전하 생각을 했습니다." 

- 전하께 돌려 드릴 수 있어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한 아이는 환한 빛을 내며 나비가 되어 사라졌고 사련은 유난히 몸을 휘감고 빛났다 사라지는 나비들을 눈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열신무자가 비무를 멈추고 군중의 분위기에 가라앉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던 요마무자가 '언제나 당신의 뒤처리는 내가 하지'하는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떨어뜨렸던 장도를 잡고 다시 사련에게로 덤벼들었다. 

다시 시작된 싸움에 분위기는 다시 점점 달아올랐고 이제는 정말 안 봐줄 거라는 듯이 장도가 더욱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간과한 것은 사련이 이렇게 옷을 여러 겹 입고 치장한 것이 오래전의 일이었다는 것과 나비가 되어 사라진 작은 인영을 생각하느라 진심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옷이 한 겹 흘러내렸음에도 눈치채지 못한 채 한 발짝 내디딘 사련이 검을 들어 올리면서도 다칠 것을 감수하자 검은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낡은 갑옷을 입은 소년이 앞으로 나와 사련의 앞을 지켰다. 그 소년의 모습을 본 사련과 모정 모두의 눈에 놀라움이 비쳤다. 그 소년이 입고 있는 갑옷과 들고 있는 검은 매우 낡았지만 두 사람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것은 옛 선락국의 양식이었으므로. 

소년병이 자신이 검으로 막고 있던 요마무자의 장도를 퉁겨내자 사련이 재빨리 앞으로 나와 요마무자의 검을 베고 굴복시켰다. 소년병이 사라질세라 사련이 다시 소년병을 바라보자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저는 군에 들어가 늘 전하께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 전하, 당신을 위해 전사한 것은 제 지고무상한 영광이니까요.

그도 좀 전의 작은 아이와 마찬가지로 빛났다가 나비가 되어 사라졌다. 사련은 나비에서 눈을 때지 못하다가 손에 나비를 쥐어보고는 이내 놓아주었다. 나비도 인사를 하듯 사련의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사라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알 리 없는 군중은 요마무자가 쓰러진 걸 확인하고 큰아버지가 요괴를 쓰러뜨렸다며 환호했고 제천무 행렬은 귀시장을 크게 한바퀴 돌고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극락방으로 돌아온 사련과 일행은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화성을 쳐다보았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쳐다볼 때는 무엇을 보느냐는 듯이 무미건조한 눈으로 보던 화성은 사련이 자신을 쳐다보자 사련의 의문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형, '그것들'은..."

"삼랑, 너의 분신... 인 거야?

"맞아, 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제는 흩어진 예전의 한이었어."

화성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전하를 뵙고는 다 쓸모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저에겐 전하만 계시면 충분하니까요."

동로산에서의 싸움 이후 나비로 흩어진 그는 하루라도 빨리 그 연인의 곁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힘이 폭주하여 흩어진 이상 모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그가 가지고 있던 장명쇄와 낡은 칼에 그의 사념을 나눠 담아 그의 연인에게 돌아왔다.

사련이 이제는 부서진 나비 모양의 장명쇄와 낡은 칼을 조금은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살짝 표면을 쓸어내리자 사금같이 흩어졌다. 그들도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 터였다.

"형,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게 있어."

"뭔데?"

"형, 혼인할까? 돌아온 뒤로 늘 하고 싶었던 말이었어. 저것들이 가로막는 바람에 할 수 없었지. 하지만 이제 폐물들도 사라졌으니 형과 혼인할 수 있겠어."

화성의 뜬금없는 말에 조금 벙쪄있던 사련은 화성이 자신을 보며 살짝 웃자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얼굴이 붉어지며 "이번은 장난이 아닌 거지?" 하며 물어봤다. 그 모습을 눈꼴시렵다는 듯이 지켜보던 일행들은 각자 자리를 비켜주며 한마디씩 던졌다.

"생신 축하합니다, 태자 전하! 오늘 즐거웠어요!"

"조심하라고, 혈우탐화. 전하 무슨 일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그래, 전하는 이번이 첫번째 혼인도 아니시니 말이야. 무려 '귀신랑'한테 시집을 가셨으니까."

"조심하게, 젊으니. 그렇다면 세 번째 혼인은 자네가 아닐 수도 있지 않겠어. 자네도 알다시피 전하께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이지 않나."

차례대로 노풍과 풍신, 모정, 국사 일행이 나가자 사련이 그들이 한마디씩 던지고 간 것을 곱씹으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삼랑 첫 번째 귀신랑 때의 일은...!"

"괜찮아. 그때의 면사포도 내가 벗겼으니. 그럼, 형은 나에게 두번 시집오는 셈이네?"

사련은 견딜 수 없는 사랑스러움에 화성에게 먼저 입을 맞추었다. 그에 응답하듯이 화성이 부드럽게 사련을 감싸고 극락방의 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그들의 혼례식이 열린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린 것은 며칠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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