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는 나를 아끼고 나는 그대를 사랑하네.


"삼랑 화났어?"
사련이 묻자 화성은 여느 때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정말 그린 듯한 미소에 사련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화났구나!'
며칠 전의 일이었다. 사련은 더 고물을 주울 필요는 없었지만 화성에게 기대기도 싫었고 가끔 바람도 쐴겸 보제관을 나서곤 했다. 그날도 여느때처럼 고물을 한보따리 싸들고 소달구지에 가득 쌓아두는데 촌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다가왔다.
"사도장 또 고물을 줍고 있는건가?"
"아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그럼그럼 자네와 소화가 없으니 마을 처녀들이 얼마나 아쉬워하던지"
촌장의 말에 사련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예전에 처녀들이 수줍은 얼굴로 닭고기를 가져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소화가 없어서 아쉬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사도장, 자네는 아직 아내를 맞이하지 못했었나?"
"...네? 뭐 그렇죠."
사련은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다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화성과 이미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남자를 아내로 맞았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지 않은가? 그렇게 대답하자 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사련을 잡아 끌었다.
"사도장 내가 꼭 부탁하고 싶은게 있네! 내게 딸이 셋이 있는데 아직 혼자라면 잠깐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는가?"
"죄송하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사련은 딱잘라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러자 촌장이 간절한 얼굴로 사련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메달렸다.
"상담이라도 괜찮네. 도장님께 실례되는 말인 건 알아. 내가 아이들에게 미리 말도 해놓겠네"
"......."
사련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 머리가 아파왔다. 촌장에 신세진 것도 있고 잠깐 상담해주는 정도는 괜찮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화성에게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할지 막막했다. 화성에게 말하면 분명히 따라오겠다 할 것이고 화성이 따라오면..
생각만해도 질투심에 속이 뒤틀렸다.
"전하!"
사련이 한참 촌장이랑 얘기하던 중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지팡이를 짚은 사내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절뚝거리며 다가온 사내는 사청현이었다.
"무슨 얘기중이셨어요?"
"아 그게..."
사련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촌장이 사청현을 보더니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공자! 마침 한사람이 부족했는데 잘되었군요! 제가 옷도 빌려드릴테니 얘기라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아 뭐 시간은 많으니 상관없지만..무슨 일인데요?"
사청현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 사련은 그를 조용히 소달구지 뒤로 데려와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사청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전하 괜찮지 않을까요? 상담정도는 해줄 수 있죠! 전하의 혈우탐화가 그리 속이 좁을까요?"
"이건 속이 좁은 문제가 아니.."
"그럼 결정된 겁니까? 자 가시죠!"
"전하 가끔은 이런 기분전환도 좋죠! 갑시다!"
촌장과 사청현의 손에 끌려가면서 사련은 어쩔 줄 모르고 하는 수 없이 잠시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의 말에 어울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외로 분위기는 사련이 생각한 것과 달랐다. 정말 그냥 가볍게 놀고 상담만 하려는 듯 제법 침착한 분위기였다. 사련에게 제일 성숙해보이는 연인은 곱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고 가볍게 담소를 이어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청현은 친화력이 좋은 만큼 금세 사련 옆의 여인의 동생으로 보이는 여인들과 잘 이야기하는 거 같았다.
"흠흠, 이 풍..아니 제가 보기에 연인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이고 연인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도 대화같아요! 본디 그렇지 않습니까?"
여인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청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련의 옆에 있던 여인은 따뜻한 눈으로 그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언니의 모습에 사련은 마음이 따뜻해져 부드럽게 말했다.
"동생분들이 무척이나 귀여우시네요."
"네 그렇죠. 아직 짝사랑밖에 못해본 풋풋한 애들이라 철도 없고 걱정이 조금 되네요. 저희 아버지가 조금 유난이시라 걱정했는데 저 공자랑 도장님같은 분이 와주셔서 다행이에요."
사련은 고개를 끄덕이고 술을 한모금 마셨다. 그런 사련을 보던 여인은 나긋하게 말했다.
"도장님은 좋아하는 분이 있으시죠?"
그 말에 사련은 그대로 술을 뿜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전에 보았을 때는 뭐랄까 속세를 멀리하고 굉장히 조용한 분 같았거든요. 상냥하시지만 어딘가 조금 쓸쓸해보이시기도 했고요. 하지만 오늘은 이전보다 밝고 혈색도 훨씬 좋아지셨어요."
여인은 다 안다는 듯이 빙그레 웃어보였고 사련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웃어보였다. 예전에는 만두 몇개 먹고 굶는 일이 많았고 몸을 항상 아무렇지 않게 굴리고는 했다. 하지만 화성이랑 함께 지내니 매 식사가 산해진미였고 고물을 줍는 일도 줄어 이전보다 혈색이 좋아질 수 밖에 없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낭자는 좋아하는 사람 없으신가요?"
"........."
여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여인을 인내심있게 기다려주자 여인은 이내 고개를 들어올려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있었으나 크게 다쳐 현재까지도 조금 사경을 헤메고 있어요. 의식은 겨우 차렸으나 완치될지 모르겠어요.."
".....아 그렇군요."
사련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마음을 많이 쓰셨어요. 그런 남자는 그만 만나고 다른 남자를 만나라고요. 그래서 아버지랑 많이 싸웠답니다. 말을 그렇게 하셨지만 저를 걱정해주신 건 알아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걸요."
"왜 그렇게 되셨는지 알려주실수 있겠습니까?"
"....도장님이라면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게다가..."
여인은 잠시 사청현과 술을 마시며 노는 어린 동생들을 눈에 담았다.
"저 애들한테도 이야기 할 수 없었는걸요."
여인은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그분을 만난 건 비가 많이 내리던 날 동생을 마중나가러 갔다가 강물에 빠져버렸을 때였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 강물이 불어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여인은 물에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물을 가득먹고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 흐릿한 시야 사이로 녹색빛이 보였다. 녹색 옷을 입은 사내는 물속에서 여인의 손을 잡고 온힘을 다해 끌어당겨 수면 위로 이끌었다.
"괜찮으십니까?"
사내는 여인을 구했고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는 어디서나 들어볼 법한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여인은 정말 기적같은 일이라 생각했다. 사련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두분이 만나셨군요."
"네 그런데 그이는 너무 정의로운 사람이었요. 늘 사람을 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의협심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치는 일이 잦았죠."
"...그렇군요."
여인의 손에 들린 술잔이 덜덜 떨렸다. 사련은 혹시 그녀가 눈물이라도 흘릴까 염려스러워 고개를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래서 더 참지 못한 저는 그 사람의 머리채를 잡고 화를 냈답니다."
이마에 살짝 돋은 핏줄에 사련은 웃으며 조용히 술 한잔을 들이키고 고개를 돌렸다.
"제가 반한 것은 그의 정의로운 모습이었고 저도 처음에는 그를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리 다쳐오고, 다쳐오면서도 웃으며 숨기고 괜찮다하는 그를 제가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인의 목소리가 울렁거렸다. 붉은 눈시울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여인이 그 사내를 사랑한 것은 그의 정의로운 모습이었고 여인은 그 정의로운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말리고 싶었고 그만하라 하고 싶었으나 그게 그 사람 자체인 것을 어쩌겠는가. 사련은 문득 화성이 무척이나 보고싶어졌다.
"....글쎄요."
사련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여인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금 그 사람이 그렇게 된것도 결국 그 때문아닙니까? 상관없어요. 그 사람의 정의로운 모습은 정말 좋으나 어째서 자기자신은 지키지 않을까요?"
"........그분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신지도 모르겠네요."
".....그 사람이 아프면 저도 아픈걸요..."
사련은 여인을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울렁거리는 속에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여인은 더 말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술을 들이켰다. 술은 달지 않고 씁쓸하기만 했다.
"전하!"
울적한 기분에 홀로 자작하던 사련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깜짝놀라 고개를 돌렸다. 긴 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붉게 입술을 칠한 채 둥근 눈매를 나긋하게 휘는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머리를 가볍게 휘날린 사청현은 싱긋 웃어보였다.
"어때요? 전하 꽤 예쁘지 않나요?"
"하하 네 예뻐요. 잘 어울리네요 청현"
물론 지금은 남자모습이었지만 예전 풍사마마의 모습과 비슷했다. 사청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사련의 옆에 앉았다.
"저랑 얘기하시던 낭자가 꾸며주셨어요. 전하는 조금 즐기셨나요? 저는 오랜만에 술을 마시니 기분이 막 뜰뜨더라고요! 하하하"
"...저는 조금 고민이 되는게 있어서요"
"전하 그럴때는 술을 더 마셔보세요! 전하가 술을 못하시진 않으시다 하셨으니 가끔은 이렇게 마시는 것도 좋답니다."
사련은 답답한 심정에 사청현이 주는 술단지를 냉큼 들이마셨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
.
.
"혀, 혈우탐화! 내가 이런 거 아니야! 전하가 마시고 싶다 하셨다고! 우왁! 지금 때리면 안돼 나 인간의 몸이랑 다를 게 없다고!!"
"...으음 청현?"
사련은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 인상을 찌푸렸다. 사청현의 다급한 외침에 사련은 경계태세를 갖추고 흐릿한 시야속에 눈살을 찌푸려 상대를 자세히 살피려했다.
그런데 웬걸, 무척이나 잘생긴 남자가 사청현의 바로 앞에 서있었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화성 이후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보면 볼수록 화성이랑 닮아있었다. 단풍보다 붉은 옷에 눈보다 흰 살갗 곧고 날카로우면서 예쁜 눈매의 남자는 무서운 표정으로 사청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사련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낮게 웃었다. 그제야 사내가 화성임을 알아본 사련은 그대로 술이 역류할 거 같았다.
"...사, 삼랑? 여긴 어떻게 왔..."
"형이 안 오길래 삼랑이 마중 왔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는데 사련은 이렇게 화성이 두려운 적 없었다. 물론 이 두려움이 그런 류의 두려움은 아니었으나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가자 형"
"...삼랑 아, 저기 저는 가볼게요"
"네 얼른 가십쇼! 전하 조심히 가세요!"
사청현은 냅다 소리치며 손을 붕붕 흔들었고 화성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 주사위를 던지고 사라졌다. 사청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후아..죽을뻔했네."
"저기 공자"
"네?"
아까 이야기하던 어린 여인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방금 그 준수한 공자는 누군가요? 엄청 잘생기셨던데.."
"낭자, 명심하세요. 낭자는 절대 도장님과 너무 가깝게 지내면 안됩니다. 다쳐요."
뜬금없는 사청현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질문을 꺼냈다.
"공자는 좋아하는 사람 없으신가요?"
"........."
"....공자?"
사청현이 말이 없어지자 여인이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하지만 이내 사청현은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지만 좋아해선 안되는 사람이거든요. 정말 좋아하는데 제가 함부로 다가갈 수가 없네요."
"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가장 성숙해보이는 여인이 동생들을 데리고 떠났고 사청현은 그들을 배웅해주며 나른한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술 괜히 마셨나봐. 환각이 다 보이네."
"......."
검은 옷의 사내는 차갑게 사청현을 내려다봤다. 사청현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은 웃어주지. 꿈에서도 안웃어주면 어떻게....하긴 내가 감히 무언가를 바라다니 술이 덜깼나봐 미안해"
"........."
".....미안해 하공자"
좋아해서 미안. 사청현은 하하하 웃더니 그대로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감쪽같이 원래 있던 장소에 돌아와 있었다.
*
사련이 다음날 눈을 떠보니 화성은 없었고 옆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게 깨달은 사련은 화성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사련이 찾은 것은 다 죽어가는 얼굴의 하현월사였다.
"인옥 전하? 안색이 왜이렇게 안 좋으세요?!"
"...전하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인옥은 초췌한 얼굴로 사련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눈밑 그림자는 시커멓게 내려와있었고 살짝 마른 체형인 인옥은 살이 쭉 빠진 것 같이 처참한 얼굴이었다.
"제가 뭔가 잘못했습니까?"
"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제발"
"인옥 전하 왜 그러세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같은 모습에 사련은 다급하게 인옥을 부축했다. 인옥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성주님이...성주님..."
"삼랑이 왜요?"
"너무 무섭습니다..."
화성은 그렇게 무자비한 자는 아니었다. 애초에 인옥을 받아들여준 거 자체부터가 나름의 자비였다. 너무 큰 소란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냥 무관심 그 자체. 화성이 직접 하나하나 신경쓰는 일은 오직 사련과 관련된 일 뿐이었다. 인옥은 그를 경외하면서도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군오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제천신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화성에게 두려움이 없는 자는 사련뿐일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귀신이 난동을 피워 처리했다는 보고를 올렸더니
'폐물, 이게 뭐지? 일처리를 이렇게 밖에 못하나?'
질문 하나라도 하면..
'하, 내가 이런것까지 하나하나 알려줘야겠나? 알아서 하지 폐물'
평소에는 들어보지 못했을 폐물 소리를 아침에 스무번은 넘게 들어야했다. 게다가 가까이만 가도 살기에 죽어버릴 거 같았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주님께서 빡이치셨구나.
금방이라도 살려달라고 통곡할 것 같은 처참한 모습에 사련은 고개를 끄덕이고 화성을 찾아갔다. 그런데 예상 외로 화성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사련을 맞이했다.
"삼랑 어제 일때문에 많이 화났어..?"
"응? 무슨소리야 형 내가 형한테 화를 낼리가 없잖아?"
"진짜?"
사련이 조심스럽게 묻자 화성은 더욱 환하게 웃어보였다.
"정말 화 안났어."
그 미소를 마주한 사련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화 났구나!'
사련을 잠시 살피던 화성은 사련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가볍게 정돈해주고 말했다.
"숙취때문에 머리 아플텐데 씻고 와. 형 정말 화 안났으니까"
"......."
화성을 살피던 사련은 화성이 그렇게 크게 화난 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처럼 웃고 있기도 하고 조금 가식적이긴 하나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미안해 삼랑 내가 말을 안하고 가서. 조금 급하게 결정된 일이라서"
"괜찮아 형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거 아니까."
목소리에는 화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화성은 일이 있어 극락방까지 데려다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련은 안도하여 화성에게 힘내라고 말해주고 방으로 돌아왔다. 딱 맞은 온도의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려던 사련은 옷을 풀어헤쳤다.
"....아?"
옷을 풀어헤치자 흰 무명옷 위에 붉은 입술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사련은 흐릿한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입을 벌렸다. 취한 사청현이 제 입술 색을 자랑하며 그의 흰 도포에 고개를 기대어 노래를 흥얼거린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사련은 아까 화성을 만났을때의 괴리감을 떠올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침마다 하는 입맞춤도 없었고 화성이 씻으러 가라 했던건...!
사련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머리를 싸멨다. 지금 당장 소리지르며 화성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마땅히 할 말도 없었다. 귓가에 화성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내가 형한테 화를 낼리 없잖아?'
조금 많이 삐졌을 뿐.
사련은 한참이나 바닥에 주저 앉아 멍하니 붉은 입술 자국만 바라봤다.
*
"....그래서 저희를 부른 겁니까?"
"응...."
모정의 날선 목소리에도 사련은 아무 반응 없이 멍한 얼굴로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째 화성은 손을 닿는 거 외에 다른 스킨쉽은 없었다. 사련이 하면 피하지 않았으나 그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려 사흘동안! 사련은 제가 욕망에 거리가 먼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련이 해봤자 뽀뽀밖에 더 하겠는가. 며칠 째 화성과 제대로 된 키스나 밤에 하는 그..일도 못하니 미쳐버릴 거 같았다. 사련은 답답한 심정에 결국 다시 한 번 모정과 풍신을 불렀다.
"사련 이번에는 또 무슨 일입니까? 통령술까지 걸고. 혈우탐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저는 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투야! 네가 그렇게 되고 싶었던 치, 치, 친구한테"
모정은 딱잘라 거절했고 풍신도 같은 마음인지 모정을 비난하면서도 오겠다 하지 않았다. 사련은 자주 부탁했던게 미안해져 부드럽고 가볍게 말했다. 정말 가볍게.
"괜찮아! 신경쓰지 마! 아무래도 내 주변 사람 중 너희가 가장 믿음직스러워서 그런지 자꾸 무슨 일이 생기면 너희에게 먼저 연락하게 되나봐..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정말 조금도 서운하지 않으니까."
정말 사련은 나름 잘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통령진은 침묵이 흐르더니 풍신의 욕지거리로 침묵이 깨졌다. 모정은 한숨을 쉬며 짜증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셋은 또다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화성이 손도 되지 않고 단단히 삐졌다 이 말입니까?"
"내 잘못이 있어서..."
모정과 사련의 시선은 익숙하게 풍신에게 향했고 풍신은 이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익숙한 상황에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고개를 돌렸다.
"저는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싸운 적도 없고요.."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대화라도 해보십시오. 혈우탐화라면 전하의 음식을 엄청 좋아하지 않습니까? 요리라도 해줘서 화를 풀어보세요."
모정은 정말 대충 대답했으나 사련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생각이야! "
"아 그렇다면..마침 제게 음식에 넣으면 맛있게 해준다는 약재가 있습니다. 전하의 요리에 넣으면 맛있을 줄 모르겠으나..예 뭐 안 넣는 것보다 낳겠죠?"
풍신은 소매안에서 푸른 빛의 약재를 꺼내보였고 사련은 환하게 웃으며 감사했다.
"둘 다 정말 고마워! 역시 최고야."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흥, 이제 다시는 이런 일에 부르지 마십시오."
풍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모정은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말하는 것 치고는 꽤 기뻐보이는 모정의 모습에 사련은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사련이 찾아간 사람은 사청현이었다.
"오 전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청현이 잘 들어갔나 걱정되어서 왔어요. 그날 어떻게 돌아간 거에요?"
사청현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눈을 떠보니 돌아와 있더라고요."
"다행이에요. 청현 잠시 제 얘기좀 들어주시겠어요?"
"전하 얘기라면 성심성의껏 들어드려야죠! 말해보세요.!"
사련은 간단하게 현 상황을 전했고 사청현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전하 그때 혈우탐화 엄청 무서웠어요. 누구 하나 죽일 거 같은 얼굴로 저한테 다가오는데 제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어요.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요?"
사청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하 연인 사이의 일은 말과 몸으로 풀어야죠. 대화, 바로 몸과 마음의 대화요! 유혹해보세요! 혈우탐화라면 쉽게 넘어갈걸요!"
사련은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혹이라니! 사련은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던 단어였다. 사련은 거듭 권유하는 사청현의 말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저었다. 사련이 넘어오지 않자 사청현은 더 말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고 물었다.
"그럼 전하는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네. 요리를 해줄까해요. 삼랑이 제 요리를 좋아하거든요."
사청현은 그 말에 골똘히 생각하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사련이 해준 음식의 맛을 떠올리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아, 네 뭐 절경귀왕이니까 네..전하의 요리는..우윽"
"청현?"
"그보다 전하 제가 이거 드릴게요! 요리를 맛있게 해주는 단약입니다. 꼭! 꼭! 넣어서 먹이세요.!!"
"고마워요 청현"
사청현이 다급하게 검은색 단약을 꺼내보이자 사련은 그걸 품에 넣고 극락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인옥을 만나 삼랑에게 있다가 보제관에서 보자는 얘기를 전해달라 부탁한 후 보제관으로 돌아왔다.
"그럼 시작해볼까!"
사련은 비장한 얼굴로 온갖 채소를 도마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액명을 칭찬한 사련의 말을 듣고 몇달간 수행한 약야는 훌쩍 날아올라 누구보다 깔끔하게 야채를 잘라내었다. 사련은 칭찬해달라는 듯 뱀처럼 꼬물거리는 약야를 가볍게 쓰다듬고 채소를 솥에 부은 뒤 물과 온갖 소스를 넣은 뒤 끓였다.
사련은 단약과 약재를 두고 고민했다. 잠시 고민한 사련은 둘 다 요리를 맛있게 해주는 것이니 같이 넣으면 효과가 두배일거라 믿고 둘 다 집어넣은뒤 뚜껑을 닫고 화성이 오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문 밖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나 왔어"
화성이 오자 사련은 배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비장한 얼굴로 솥을 열어보았다. 솥 안은 처참했다. 분명 야채만 넣었는데 보라색의 액체같은 것이 솥 바닥에 달라붙어있었다. 사련은 황당한 얼굴로 솥을 내려다 보았다.
"..어 음 그러니까 하하하 삼랑 너를 위해 요리를 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니야 형. 형이 기껏 해준건데 안 먹을 수는 없지 마침 배고팠는데 한 그릇 줄래?"
화성이 그렇게 말하자 사련은 하는 수 없이 그릇에 음식을 퍼 담았다. 그래도 단약과 약재를 넣었으니 맛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화성은 웃으며 그 그릇을 받아들고 한입 한입 입에 넣었다.
"어때? 이번 요리 이름은 화경국지색탕이야"
"오 정말 좋은 이름이야. 형 이번 요리는 꽤 성공적.."
말을 하던 화성은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화성의 안색이 나빠지자 사련은 다급하게 화성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화성은 제 몸이 이상한 걸 느끼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삼랑?"
"........"
자신의 몸을 빠르게 살핀 화성은 이내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끼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련은 이런 모습의 화성은 처음이라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사련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야말로 화성도 못 먹을 정도의 괴작을 만들었구나.
"괜찮아? 삼랑"
"...응 난 괜찮아 형"
"삼랑 역시 이 요리는 안먹는게 낫겠어 내가 처리할게."
사련이 솥을 버리기 위해 들어올리자 화성은 사련을 말리며 평소처럼 웃어보였다.
"괜찮아 형.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기분탓이었나 봐"
화성은 그렇게 말하며 이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사련이 만든 음식을 다 먹어치웠다.내내 노심초사 하던 사련은 매우 안도하여 빙긋 웃어보였다. 이제 사청현이 말해준 유혹이라는 것에 도전할 차례였다. 물론 그럴 용기가 없는 사련은 유혹을 대화로 승화시키기로 했다.
".....삼랑 나한테 화났었지?"
"........"
"내가 잘못했어 옷에 묻어있던 입술은 청현의 것이었어 다른 여인의 것이 아니야. 그냥 조금 취해서 어쩌다보니 묻은거야. 오해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
"삼랑?"
사련이 부르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화성은 사련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사련은 새빨개진 얼굴로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자 화성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말했다.
"형"
"으, 응?"
"왜 늘 미안하다 그래?"
그 물음에 사련은 말문이 턱 막혔다. 화성은 조금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사련을 꽉 끌어안았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형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알아."
화성도 알았다. 사련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바람을 피우거나 여자를 만나 시시덕거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자꾸만 질투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형을 안기라도 하면 자제를 못할까봐 그래서 피한거야."
".......삼랑"
귓가에 들려오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 사련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도 떨리는 손을 들어 화성을 마주 안았다.
"알았어. 앞으로 조심할게 내가..."
"형."
"응?"
"나 화났어."
아까는 화 안났다며? 사련이 당황한 얼굴로 묻자 화성이 손을 뻗어 사련의 단단한 배위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사련은 더 새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잘 익은 토마토처럼 익어버렸다.
"사, 삼랑?"
"형 기억안나? 여기에 깊은 상처 입고 왔었잖아."
"아"
그제야 사련은 화성이 어딜 쓰다듬는지 깨달았다. 며칠 전 사련은 기원을 처리하러 간 날 마을에 나타난 철갑을 두른 요괴와 수십의 악령을 처리하러 갔었다. 수십의 악령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빈틈을 보여 철갑을 두른 요괴의 손톱에 복부를 깊게 베였었다.
그때 사련은 뭐라 했던가. 화성에게 미안하다며 자신은 괜찮다고 웃었었다. 그리고 피곤하고 지친 바람에 잠에 들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화성의 표정이 무척 화나있었던 것 같았다.
"형도 사람이면서."
"...뭐?"
자신의 신은 제 한몸을 혹사시키더라도 창생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었다. 사람들은 사련을 경외했으나 그가 패배하자 바로 등을 돌리고 그의 몸에 칼을 찔러 넣었다.
수십 수백개의 칼이 그의 몸에 박혔다. 그럼에도 그의 신은 다시 일어나 창생을 지키고자 하였다. 사련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화성은 사련이 창생을 멸하고자 한다면 화성은 기꺼이 모든 창생을 멸할 것이며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한다면 기꺼이 그를 위한 장기말이 될 수 있었다.
화성의 목숨, 영혼, 그의 모든 것이 사련의 것이기에.
선택은 사련이 하고 화성은 그가 바라는 걸 이루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아주 가끔은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사련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 뻔한 순간이 올때면 사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그의 발밑에 엎드려 빌고 싶었다.
'구할 가치 없는 창생 따위 신경쓰지말고 전하는 전하만을 생각해주실 수 없으십니까.'
하지만 화성은 알았다. 제가 그런 말을 할 일은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의 신이라면 창생을 구한다는 선택을 몇번이고 할테니까. 그 선택을 하는 것이 그의 신이기에. 그리고 그 선택을 하는 사람이 곧 사련이고 화성은 그런 사련을 사랑하니까.
"형"
"....응?"
사련은 고개를 들어올려 옅은 갈색빛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화성은 픽 웃음이 나왔다. 제게는너무 과분하지 않은가. 사련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화성의 눈치를 살필 필요는 없었다.
'나도 참 약았군.'
화성은 사련의 어꺠에 고개를 묻고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욕심을 부렸네요."
"..아니야. 삼랑 내게 화내도 괜찮아. 삼랑은 내 신도이자 연인이니까."
사련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화성은 자신을 사련보다 아주 낮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사련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충직하며 올곧은 마음은 기뻤으나 화성은 연인이 아닌가? 화가 나면 얘기할 수 있고 서로 풀어가면 그만이었다. 사련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목구멍 깊숙한 곳이 간질거리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목소리까지 귀에 울려퍼졌다.
'상냥한 전하라면 뭐든 들어주실 거다. 그러니 말해.'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 견딜 수 없었던 화성은 사련의 어깨에 가만히 고개를 묻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리고 말했다.
"형, 형도 사람이잖아."
"응? 그렇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화성은 다시 한 번 사련이 며칠 전 크게 베여 곪아터졌던 부위를 쓰다듬었다. 그 자리는 은나비가 치료해 흉터 하나 남지 않았지만 화성은 정확하게 그 부위를 찾아냈다. 화성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사련은 화성의 손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괜찮아 삼랑 별거 아니.."
"별 거 아니라고?"
화성은 갑자기 더 못들어주겠다는 듯 사련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몇 번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형, 왜 이게 별게 아니야? 형 피를 한 웅덩이만큼 흘리고 그렇게 길게 베였었잖아. 어떻게 그게 별게 아니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2주는 넘게 치료하고 고생했어야 했어."
"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이랑 다른 걸? 이 정도는 익숙해서.."
화성은 아무말도 하지않고 사련을 빤히 응시했다. 사련은 언젠가 이런 시선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화성이 그를 구하기 위해 상천정에 찾아온 그날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사련을 보던 눈이었다.
"형도 사람이잖아. 형도 아프잖아."
"........"
"칼에 찔려서 괜찮은 사람따위 없어. 그런 인간이 있을리가 없잖아."
화성은 또 한참이나 그를 빤히 응시했다.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눈빛을 마주하자 사련은 문득 며칠 전 이야기했던 여인이 떠올랐다. 여인이 한 말이 이런 의미구나. 그래서 그때 아파하며 우는 여인을 볼때 화성이 떠올라 당장 달려가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형이 아프면 나도 아파. 아파서 미쳐버릴 거 같아."
사련의 고통까지 전부 그가 떠안고 싶었다. 하지만 사련이 그걸 바라지 않으면 화성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고 같이 아파했다.
"아파요. 전하"
화성은 어떤 고통이든 견딜 수 있었다. 무간에 쳐박히든 다시 동로에 쳐박혀 살육전을 반복하는 고통따위 그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련이 아프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이 몇천배는 아프고 괴로웠다.
"괜찮을리가 없어."
"......삼랑"
괜찮아서는 안되고.
사련은 아연하게 화성을 쳐다보았다. 무척이나 낯선 기분이었다. 모두들 사련에게 희생을 부탁했고 사련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어느 순간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자신만 희생하면 모두 해결될 일이기에. 묵묵히 참고 견디고 지나가다 보면 어느새 모두 다 끝나있었으니까. 사련만이 상처입은 채로.
아.
사련은 문득 깨달았다. 아주 당연한 사실이면서도 꽤 오랫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사련 자신도 사람이었구나.
"...고마워 고마워 삼랑"
"........."
분명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사련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련은 웃으며 화성의 목에 팔을 둘러 힘차게 끌어안았다. 화성은 얌전히 그의 어깨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아, 우리 삼랑 걱정도 많지.
"그거 알아? 삼랑 나는 이제 상처를 입으면 네 생각이 가장 먼저 나."
철갑 요괴의 발톱에 살이 박히는 와중에도 사련은 화성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화성을 알까? 아니 아마 알것이다. 사련이 화성을 만난 뒤로는 그에게 휘말려 제 몸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리게 되었다. 상처 하나 입을까 염려스러웠고 사독이 가득 묻은 해골을 마주치면 손도 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리 신경쓰지않았어. 내가 다쳐도 금방 나을거고 굶어도 나는 죽지않으니까. 내가 어떻게 돼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
"...하지만 어느새 하나하나가 신경쓰여. 다치면 네가 마음아파할까봐. 잘먹고 잘자고 그 당연한 일이 새삼스럽게도."
"........"
"나는 이제야 숨이 쉬어져..살아 있는 거 같아."
화성은 사련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직하게 말했다.
".....형,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 형 자신을 더 아껴줘. 소중히 해줘."
"응!"
사련은 환하게 웃으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욕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화성을 바라봤다. 화성은 마침내 항복하듯이 웃으며 사련의 얼굴이 몇 번이나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사련의 입술에 깊에 입을 맞췄다. 오랜만에 닿는 입술에 사련은 기뻐하며 화성을 받아들였다.
*
다음날 화성은 어두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마치 꿈에라도 깬 사람처럼 몇 번이고 제 몸을 살피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사련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화성이 말했다.
"형 아무래도 저 음식 조금 이상한 거 같아."
"응 그래? 뭐가?"
화성은 조금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형한테 이상한 말까지 다 해버렸잖아. 아무래도 자백제 같은 성분이 있나봐."
"그런가?"
딱히 이상한 말을 하지 않은 거 같은데? 사련이 묻자 화성은 한숨을 토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분명히 뭔가 있어."
"음...아! 아무래도 이 약재랑 단약을 섞어서 그런가봐."
사련은 품에 넣어놓은 약재랑 단약을 꺼내보였다. 화성은 그것을 하나하나 살피더니 자백제의 원료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며 영력까지 담겼다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절경귀왕도 술술 불게 하는 자백제라니 사련은 감탄하며 제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형에게 못보일 꼴을 보였네."
"그런 거 없다는 거 알잖아."
사련은 살풋 웃으며 화성을 품에 당겨 안고 몇번이고 입을 맞췄다. 침울해하던 화성은 불타는 시선으로 사련을 바라봤다. 얼굴이 다 뜨거울 지경에 사련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더욱 환하게 웃었다.
"오히려 좋았는걸? 평소에 네가 네 얘기 해주지 않으니까"
"......"
"이런 투정은 좋아. 얼마든지 해줘."
사련의 품에 얌전히 안겨있던 화성은 고개를 들어올리고 말했다.
"응. 그보다 형 알고 있지?"
"뭐를?"
"오늘이 형 생일이잖아."
화성의 말에 사련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화성이 화났다는 사실에 바쁘게 움직이느라 자신의 생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형이 보제관에서 함께 생일을 보내자는 줄 알고 달려왔는데 아니었구나?"
"...사실 생일을 별로 챙기지 않아서 그런가 잊어버렸나봐"
혼자 살았을때는 딱히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혼자 축하해봤자 괜히 기분만 울적했고 딱히 분위기도 나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 생일을 챙기는 걸 관뒀었다. 그 말에 화성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웃었다.
"앞으로 내가 계속 축하해줄테니까. 괜찮아 형"
"......"
"네년도 내후년도 800년 뒤의 생일도 함께 보내자."
사련은 더 말하는 대신 화성의 품으로 와락 안겨들어 고개를 가슴팍에 묻었다. 두팔이 화성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자 화성은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생일 축하해. 형"
"사랑해 삼랑"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다 이내 웃었다.
역시 생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보내는 게 가장 완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