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려움에 대하여
'네 곁에는 이제 아무도 없을것이다. 너는 평생 혼자일거야. 그 누구도 너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너의 옆에 있어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예전의 사련은 그 말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온 세상의 모든 영광과 빛을 품은채 하늘을 올랐다가 땅으로 쳐박히는 기분은 다시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하기만 했다. 모정이 떠나고 지키고자 했던 창생조차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칼로 내찔렀다. 마지막으로 풍신이 떠나고 그의 부모까지 떠난 순간 사련은 기대를 내려놓았다.
사무치게 괴로웠고 아팠으며 아무리 울고 소리쳐도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두운 심해 속에 갇혀 숨이 막히도록 소리질는데도 애꿎은 공기방울만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가 하나 둘 생겨나고 곪아 터질때까지 끌어안으니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롭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저 무뎌진 것일 뿐이었지만 사련은 괜찮았다. 정말로 괜찮았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외롭지 않느냐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괜찮아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련이라면 이렇게 말해주리라
"전혀?"
사련은 정말 운이 없었다. 없어도 너무 없었다! 기원을 듣고 마을에 나타난 요괴를 해결하러 왔는데 이게 왠걸. 재수없게도 10살짜리 꼬마도 안 걸릴 함정에 걸려 갇힌 신세였다. 자력으로 빠져나가기는 힘든 구조라 그는 다 때려부수려는 걸 멈추고 조금 더 살펴보기로 했다. 그때,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무도 너를 구하러 오지 않아.'
사련은 가볍게 무시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마을에 나타난 요괴구나.
'너는 평생 이곳에 혼자 남겨질거야.'
사련은 역시나 무시하며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눈에 띄는 점은 없으나 법력을 담아서 한곳을 계속 공격하면 깰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무 소용 없어. 너는 여기서 나의 먹이가 될것이다!'
사련이 대놓고 무시하자 화가 난건지 목소리가 귀가 아플정도로 울려퍼졌다. 사련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이 귀신도 백화선인처럼 사람들의 두려움을 먹이로 삼았나 보네.'
당연히 사련은 아주 조금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게 뭐? 할 수는 있는 일인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힘이있으면 진작 잡아먹었겠지. 저렇게 떠들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사련의 이런 태도에 제대로 분노했는지 커다란 목소리가 와락 울려퍼졌다.
'너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네 곁을 떠날거야!!'
그 말에 사련은 눈을 크게 뜨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은 목소리의 주인은 자뭇 기분이 좋아졌다. 드디어 이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는 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은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네가 믿는 그 사람 지금은 곁에 있지만 언젠가 떠나버릴 걸? 아닐 것 같아?
"........"
'과연 누가 너같은 걸 사랑해줄까? 지금은 네 곁에 있지만 결국 떠날 것이야..!!'
사련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사련이 공포에 질려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줄 알고 신이 나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가 기대한 달콤한 두려움이 아닌 매캐한 동굴의 공기만이 입안에 잔뜩 들어왔다. 그 순간 사련이 정확하게 법력을 두른 손으로 요괴의 입을 쥐어짜듯이 틀어쥐었다.
"염병하지 말고 조용히 해."
사련은 요괴의 입을 있는 힘껏 내려치기 시작했다. 요괴가 고통어린 비명을 질렀지만 사련은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꾹꾹 눌러담아 마구잡이로 내려쳤다.
"나는 지금 당장 만나러 가야할 사람이 있어. 곧 있으면 내 생일이거든. 생일에는 소중한 사람이랑 함께있어야 해서말이야."
요괴는 다 불어터진 입으로 온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리고 그 사람은 절대 안온다!! 너를 구하러 오지 않아!!"
사련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어보였다.
"아니 분명 올거야."
나는 믿고 있거든.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빙긋 웃어보였다.
*
어둡고 척박하며 푸른 빛과 붉은 빛만이 어지럽게 빛났다. 사람의 형태를 한 시체부터 짐승의 사체까지 괴이하게 얽히고 뒤섞여 있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피가 낭자한 무간 속 밑바닥에 쳐박힌 도깨비 불 하나가 맹렬하게 푸른 빛을 내뿜었다. 그 크기는 무척이나 작았으나 온세상을 태울듯이 환하게 빛났다.
비명이 낭자한 무간 속 같은 말이 계속 울려퍼졌다.
'돌아가야 한다.'
그 작은 혼백은 사그라지지 않고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 말만은 반복했다.
'돌아가야 해.'
혼백은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누구인지도 모른채 그 혼백은 무언가 아주 강한 미련만이 남아 차마 사라지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돌아가야 한다는 말 만을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한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저는 왜 살아야 하나요?'
누군가 그에게 해준 말이 아닌 자신이 한 말 같았다. 혼백은 그 목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몰랐다. 왜 존재하는지 어째서 이렇게 살아있는지. 자신 스스로를 옭아멘 이 마음이 대체 무엇이길래.
'살아가야할 이유를 모르겠다면..'
청아하고 부드러우며 다정한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흐릿하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어둠속의 그를 밝혀주는 한줄기의 빛같았다. 푸른 불빛이 사그라지고 널린 시체와 피비린내가 낭자한 곳에서 검은 머리의 남자의 형태가 드리워졌다.
"돌아가야만 해."
검은 손톱이 허공에 긁듯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강하게 무간 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를 위해 살아가렴.'
나의 모든 것인 그분을 위해서.
"돌아가야 해.."
창백한 하얀 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붉은 눈동자와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몇번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피에 미끄러지고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몸은 몇번이고 나뒹굴었다.
그런 그를 일으키려는 듯 햇살같이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삼랑'
갈색의 머리카락에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탐스럽게 빛이 났다. 곱게 웃는 눈동자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우리라. 휘어진 입술이 지은 웃음은 오직 그를 향하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이 멀 것만 같이 아름다워 심장이 거세게 흔들렸다.
행복에 미쳐버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다리가 생겨나고 긴 흑발의 남자가 온몸이 피를 물들인 채로 온힘을 다해 시체의 산을 기어올랐다. 기억은 이제 완전해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이 무간을 박차고 나가야만 하는지도. 오직 그분을 위해서.
'제발, 제발 이러지마. 그동안 내 말을 들어 준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그분이 나를 기다리신다.
'넌 옆에 남아 줄거지? 정말 못하겠어. 두번, 벌써 두번이잖아! 제발 세번은 못 견뎌!'
금지옥엽의 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동자에서 흘러내린 눈물과 함께 울고 있는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았다. 돌아가야 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분의 곁으로 가서 그분을 홀로 두지 않게 그분이 외롭지 않게
다시는 그분을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수천, 수만 개의 은나비가 수천년 넘게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할 깊은 어둠만이 존재하던 무간 전체를 밝혔다. 환한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그 가운데 붉은 옷의 남자가 섰다. 화성은 가만히 손을 뻗어 올렸다. 그에 맞춰 은나비들이 미친 듯이 흔들리자 멋모르는 악령들과 요괴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전하"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완벽하게. 그분을 홀로 두지 않기 위해. 이딴 무간 따위 수십, 수백 번이고 박차고 나갈 수 있으리라.
정월 대보름. 상원 밤 달이 환하게 뜨고 수천개의 장명등이 하늘의 별처럼 어둠을 밝히며 환하게 빛났다. 눈부신 꿈결처럼 너무나 아름답게 빛났다.
화성은 당연하게도 태창산 황극관으로 향했다. 사련은 없었지만 화성은 그가 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장명들을 띄운 순간 그의 세상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변함없이 하얗고 낡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다정하기만 한 둥근 눈매가 눈물에 일렁거렸다. 밝은 장명등 빛은 그의 갈색 머리카락은 황금빛으로 비추었다. 사련은 놀라움 기쁨과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화성을 물끄럼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몇번이고 비틀거리며 그에게 달려왔다. 혹여 넘어질까봐 염려스러워 화성도 몇번이고 발을 헛딛으며 달려갔다. 돌아왔습니다 전하. 화성은 속으로 읊조리며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숨이 턱 막힐정도로 그들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한마디 말도 없이 거친 숨만 몰아쉬며 울음 섞인 신음 소리만 겨우 내었다.
"삼랑"
마침내, 정적을 깬 울음섞인 목소리에 화성은 그제야 꿈에 깬 듯 대답했다.
"다녀왔습니다 전하"
돌아왔구나. 맞닿은 따뜻한 온기와 심장소리만이 모든 것이 멈춘 그의 세상에 이곳이 진짜임을 일깨워주었다. 드디어 전하의 곁으로.
사련은 그의 허리를 부숴뜨릴 듯이 온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사련은 한참이나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화성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삼랑.."
"...형"
"삼랑..."
사련은 삼랑이라는 단어밖에 모르는 것처럼 계속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몇번이나 화성의 얼굴을 더듬으며 한참을 게워내듯이 울었다.
"형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해."
"....아니 아니야..."
네가 팔백년을 기다려준것처럼 나도 일년이든 백년이든 팔백년이든 만년이든 너를 기다릴 수 있었어. 하지만..
"외로웠어."
"....."
"나는 너무 어리석었어..두 번도 힘들었는데 세번째나 되니까 정말 미쳐버릴 거 같았어."
사련은 언제나 미소지었다. 모정이 물었을때도, 다른 누군가 찾아와 몇 번이고 물었을때 사련은 믿는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밤이면 애써 숨겨놓은 자그마한 불만이 꿈틀거렸다.
'모두 너를 떠났잖아.'
홀로 남은 밤은 추웠고 외로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련은 묵묵히 그 목소리를 무시했지만 그는 몇번이고 그에게 속삭였다.
'모정도, 네 가장 오랜된 친우이자 충신이었던 풍신도 부모님도 모두 떠났는데 그가 돌아올까?'
사련은 몇번이고 머리를 감싸안고 떨었다. 머리로도 마음속으로 믿고 있었다. 그가 돌아올것이라는 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이 불안이 이 꿈이 자신의 나약함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았다.
매일 매일 화성의 생각이 끊이지 않았고 또 거의 매일 그의 꿈을 꿨다. 어느 날의 화성은 그의 마지막 기억처럼 나비처럼 흩어졌고 또 어느 날의 화성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돌아봐주지 않았다. 계속 반복되는 꿈속에서 사련은 또 이 씁쓸함에 익숙해져 갔다.
"네가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랬어."
"........"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랬어."
혼자 하는 이야기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겨우 입을 뗴어봐도 갈 곳 없던 소리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차가운 방안에서 흩어졌다. 하지만 이제 들어줄 이가 있었다.
"형"
상냥한 목소리에 사련이 눈을 떴다. 화성은 손으로 그의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몇번이고 붉게 물든 눈가에 입을 맞추고 젖은 뺨을 달래듯이 쓰다듬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전하"
"......삼랑 보고 싶었어..정말 많이"
사련도 고개를 들어올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화성은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황극관안으로 향했다. 사련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입을 맞추는 데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황극관 안에 들어와있었다.
혀가 얽히고 입술은 빈틈없이 맞붙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머리가 빙글뱅글 돌았다. 겨우 겨우 화성을 뗴어낸 사련은 황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사, 삼랑?"
뭐, 뭐지? 왜 이렇게 잘해? 사련이 제대로 정신을 못차리는 와중에도 화성은 빈틈없이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눈썹 붉게 물든 눈가 입술 뺨 아래턱 코끝까지. 사련은 얼굴을 붉히고 눈을 꼭 감아버렸다. 화성은 피식 웃으며 사련의 속눈썹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괜찮겠어? 형."
"......응"
사련은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돌리고 말을 얼버부렸다. 아무리 색사나 여자와 관련된 일을 멀리하고 살았어도 팔백년이나 살았으니 사련도 그 정도는 알았다. 지금 당장 땅 파고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부끄러울 뿐.
"겁내지 마세요. 전하"
화성은 웃으며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농밀한 입맞춤과 반대로 가벼운 입맞춤에 사련은 조금 정신을 차렸다.
"절 믿으세요. 전하가 싫다 하시면 바로 물러나겠습니다."
"알았어."
사련은 이번만큼은 화성이 눈꼽만큼도 신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그의 목을 더욱 세게 끌어안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형"
"응?"
"..사랑해"
화성은 웃음기를 지우고 잔잔하게 말했다. 사련은 얼굴이 확 붉어지는 와중에도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두사람의 입술은 빈틈없이 맞붙었다. 옷은 어느새 완전히 풀어헤쳐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화성은 사련의 두다리 사이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화성의 머리카락이 위험한 부분을 간지럽히자 사련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사, 삼랑! 이게 맞을까?"
그래도 자신이 형인데 자신이 리드해야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사련은 정말 이런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랐고 키스도 처음이라 숨쉬는 타이밍도 제대로 못 잡는 처지였다. 입을 뻐끔거리며 겨우 말을 이어가자 화성은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절 믿으세요 전하."
"..아, 어? 응..."
사련은 다시 눈을 꽉 감아버렸다.
어스름한 푸른빛의 장막이 드리운 새벽.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화성은 몸을 일으켰다. 눈이 일찍 떠진 그는 자연스럽게 제 옆에 누운 사련을 바라보았다.
"..으응"
추운지 조금 몸을 움츠리며 뒤척이는 사련을 보자 픽 웃음이 나왔다. 화성은 사련이 깰까봐 조심스럽게 이불을 올려 덮어주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화성은 사련을 껴안고 한참을 늦장 부리다가 불을 부칠 겸 황극관 주변 상태좀 살펴볼 겸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흐음"
중력이 갑자기 강해지기라도 했는지 화성은 영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젯밤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벅찬 밤이었다. 그는 아직도 여운이 남아 사련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아직 겨울이라 곧 꽃이 피겠지만 춥기는 추웠다. 사련이 춥게 둘 수는 없으니 화성은 하는 수 없이 밖을 나섰다.
'장작도 적당히 있고 주변도 깨끗하군.'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하고 꽃나무도 황극관 주변에 심어 있어 봄이 오면 아름다운 꽃으로 만개할 것이다. 산길도 깔끔하고 소달구지도 있어 사련이 나름 잘 지낸 거 같아 안도되었다. 화성은 그가 혹시 초조해할까 절망할까 통곡할까 걱정되었으나 다시 본 사련이 변함없는 모습이여서 화성은 기쁘기만 했다. 이제는 행복할 일만 가득할테니.
화성은 불을 떼고 음식이라도 할 생각으로 나무장작이 가득 들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화성이 막 나무장작을 아궁이 앞에 놓은 참이었다.
우당탕탕!!
무언가 요란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황극관 안쪽에서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무언가 크게 넘어지는 소리와 이불이 마구잡이로 헤집어지는 소리에 화성을 부엌을 나왔다.
"삼랑!!"
사련의 다급하게 소리질렀다. 횡설수설 말까지 더듬으며 화성을 부르던 사련은 화성을 발견하고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옷도 제대로 여미지 않은 채 사련은 이제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몇번이고 비틀거리다 화성을 꽉 끌어안았다.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허리를 부서뜨릴 듯이 끌어안았다.
"아니야..사라지지마...제발 제발 부탁이야! 또 떠나지 말아줘...떠나지 않겠다면서 지금 떠나면 네번이야..나 못견뎌 삼랑..삼랑.."
어물거리며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사련은 고개를 묻고 몇번이나 화성을 쓰다듬었다. 그가 진짜인지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하려는 거 같았다. 그 모습에 화성은 다급하게 그를 마주안았다. 화성도 사련을 온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형, 형..! 전하..!!"
커다란 목소리로 몇번이고 부르자 사련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화성의 하나뿐인 눈동자가 애틋하게 흔들렸다. 걱정이 가득 담긴 눈동자를 마주하자 사련은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질 거 같았다.
꿈이 아니구나.
사련은 떨리는 손을 뒤로 숨기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하하 미, 미안해 삼랑! 내가 꿈이랑 헷갈렸나봐 네가 옆에 없길래 또 사라진 줄 알았어. 갑자기 미.."
"형"
화성은 팔을 뻗어 사련의 허리를 감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사련은 한참이나 멍때리듯이 서있다가 화성을 마주안았다.
"미안해..삼랑"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는 아무 잘못도 없으신걸요."
누구보다 사련에 대해 잘 아는 화성은 그가 애써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사련은 목이 쉬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또 사라진 줄 알았어."
화성이 없는 밤, 사련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화성을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날에는 화성이 꿈에 나왔다. 사련은 무척이나 기뻐 환히 웃으며 화성을 끌어안았다.
'...삼랑?'
제대로 안아보려 하면 화성은 녹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은나비 몇 마리만 나풀거렸으나 그조차도 사그라들었다. 사련은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는 한참이나 멍하니 그곳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또 나의 사랑이,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아아아아!'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걸까? 이대로 평생 혼자 남겨지는 걸까? 화성은 변함없이 웃으며 몇번이고 사련에게 다가왔다. 그는 다시 사라졌다. 사련은 제 마음이 변하거나 화성의 마음이 변할 것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날리도 없으니 두렵지 않았다.
그것보다 두려운 것은..
"형 아직 날이 추우니 들어가서 쉴까?"
".....불을 떼려는 거 아니었어? 나는 신경쓰지 말고.."
화성은 슬프게 웃으며 다급하게 뛰어오느라 엉망이 된 사련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같이 껴안고 자면 따뜻할 거야. 그보다 형 당분간은 아무데도 가지 말고 같이 있자."
계속 함께 있을게. 그 말에 사련은 멍한 눈을 깜빡이다 화성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자."
"응 형"
화성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함께 있자.."
*
사련은 그날을 생각하면 조금 부끄러웠다. 어린아이처럼 울며 메달리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그 이후로 며칠동안 화성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사련의 곁에 붙어있었다. 사련은 그 이후로 어떤 악몽도 꾸지 않았고 사련을 보러온 모정과 화성이 마주치면서 모정이 길길이 날뛰고 화성과 싸우는 바람에 꿈이라도 깬 듯 현실이 보였다. 삼랑이 돌아왔구나. 그 길로 화성과 사련은 보제관으로 돌아갔다.
사련은 이제 두려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 그러면 이제 순순히 나갈 방법을 말해줄래?"
사련은 생긋 웃으며 입이 다 불어터져 말조차 하지 못하는 요괴를 흔들었다. 요괴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흐...하하!...으디 한...해보..시...든...?! 어억!!"
그 순간, 공간 전체가 강하게 흔들렸다. 요괴는 불안한 얼굴로 부은 눈을 깜빡거렸다. 반면 사련은 환하게 웃으며 요괴를 내던지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것 봐."
사련이 요괴를 돌아보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외쳤다.
"삼랑이 나를 구하러 올거라 했잖아!"
귀신이 만든 이공간에 커다란 금이 가더니 환영이 완전히 부서졌다. 수십, 수백, 수천의 은나비가 사련의 뒤에서 날아들어왔다. 그리고 사련은 자신의 목을 감싼 붉은 소매와 익숙한 은제호완을 보고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삼랑!!"
화성은 안도한 얼굴로 사련을 안아들고 붉은 주사위를 던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더니 극랑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련이 돌아보자 화성은 점짓 화난 척 말했다.
"형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내가 같이 가겠다니까 왜 거절했어?"
"하하 미안해 삼랑 괜히 너를 고생시키기 싫었는 걸."
사련은 웃으며 화성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사련은 아직 이런 행위가 조금 부끄러웠지만 부끄러움 따위 이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화성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주는 것만으로 몇 번이고 입맞춰줄 수 있었다.
"형"
"응?"
"생일 축하해 형"
그 말에 사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화성도 사련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는 웃어보였다.
"제일 먼저 축하해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형이 하필 형 생일 하루전에 기원처리를 하러 가서 안돌아와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하하 미안해 삼랑"
"오늘 밤은 피곤할테고 둘만 있고 싶으니까 내일 오후에 연회를 열거야."
화성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 말에 사련은 눈을 반짝이며 화성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고마워 삼랑! 그럼 허락해준거지?"
사련이 며칠 전 생일 연회에 반월과 소배장군, 우사, 배명, 풍신과 모정 등등을 귀시장으로 초대하고 싶다 했었다. 한 사람 한사람의 이름이 나올때마다 화성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풍신과 모정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싸늘하게 일그러졌다. 그딴 놈들 보기도 싫다는 얼굴에 사련은 하는 수 없이 포기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준비해주다니 사련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화성에게 애교부르듯이 붉은 옷에 뺨을 부볐다.
"정말 고마워 삼랑 정말 기뻐!"
"형이 기쁘다면야...그보다 형 밖을 볼래?"
화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창 밖을 가르켰다. 그 말에 사련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감탄했다.
"사도장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성주님과 백년해로 아니 만년해로 하십시오!!"
귀신들 모두 장명등을 하나씩 안아들고 질서정연하게 소리쳤다. 작년 화성의 생일때는 그렇게 마구잡이로 소리지르더니 이번에는 제법 잘 맞았다. 화성이 귀시장의 귀신들을 얼마나 연습시켰는지 안봐도 눈에 훤했다. 고생이 많으셨네요. 사련이 건네는 무언의 눈빛에 귀신들은 왈칵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 이거 봐."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화성의 품에는 장명등 하나가 들려있었다. 화성은 그것을 사련에게 건네주었다.
"형의 소원을 빌어봐 그게 무엇이든 내가 들어줄테지만 이런 것도 좋지."
"....내 소원"
사련은 잠시 생각하다 잔잔하게 웃으며 글씨를 써내려 갔다. 사련이 붓을 내려놓자 화성은 사련의 손을 잡아 끌어 같이 장명들을 들어올려 하늘로 날렸다. 그것을 신호로 귀신들이 하나 둘 장명등을 날려보냈다. 하늘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어두운 하늘을 환하게 밝혀내는 별처럼 서서히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갔다. 사련은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다 문득 시선을 돌려 화성을 바라보았다.
"삼랑"
"응?"
"무슨 소원을 빌었어? 말해줄 수 있을까?"
"음..형이 생각하기에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 거 같은데?"
"......."
사련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성이 소원을 빌 이유가 없었다. 부족한 거 하나 없는 화성이 무슨 소원을 빌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련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아무것도 안 빌었어?"
"오 정답이야. 대단하네 형"
"정말? 왜 아무것도 안빈거야?"
사련의 질문에 화성은 눈을 접어 웃으며 사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 소원이 형의 소원이니까."
"......."
"전하가 바라시는 소원이 저의 소원일테니까요. 굳이 두번이나 같은 소원을 빌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말에 사련은 장난기 없이 웃었다. 깊은 애정과 행복감 알 수 없는 애타는 마음에 화성도 사련을 돌아보며 가만히 그와 눈을 맞췄다.
"사랑해"
온갖 미사여구 하나 없이 담백하며 진지한 사랑의 말이었다. 화성은 가슴이 벅차 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행복해 미친다는 것이 이런것이구나. 화성과 귀신들이 볼까 사련을 안아 침상위로 올라가 누웠다. 서로 마주 안으며 그들은 황홀감에 취했다. 그리고 화성과 함께 목욕물에 들어간 사련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화성은 그의 머리를 정돈해주다 물었다.
"형"
"응?"
"형은 무슨 소원을 빌었어?"
"하하 조금 부끄럽네. 놀리면 안돼 삼랑."
"내가 그럴 리 없잖아 형."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 화성의 말에 사련은 의심스러운 척 화성을 바라보다 이내 푸스스 웃고는 나른하게 속삭였다.
"내 소원은..."
내 사랑, 나의 가장 충실한 신도와 영원히 함께하기를.
writer 연꽃이 필무렵 @lotus2203



